<난중일기> 27
출발 당일 조선 수군은 거의 쉬지 않고 달려 부산 앞바다까지 항해했다. 이에 대하여 경험 많은 이억기 수사 등이 원균에게 무리한 항해라고 항의했겠지만, 원균은 이미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 상태였다. 그는 권율에 대한 분노와 이순신에 대한 열등의식이 동시에 밀려와 모든 정력을 전장에 쏟아붓고 있었다.
총사령관의 이런 비정상적 지휘는 고스란히 휘하 병사들에게 감정적으로 전달되었고, 무리한 항해로 인해 조선의 격군들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지쳐있었다. 당시 해전에서는 노를 젓는 격군(格軍)이 전쟁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했다. 격군이 힘이 빠지면 배가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한산도에서 부산 앞 절영도까지 도착한 조선 수군의 시야에 일본의 첩보선(諜報船) 몇 척이 보였다. 도망가는 첩보선을 따라 원균의 전 함대는 추격하는데, 한편에서는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일본의 보급선을 발견하고 원균은 부대를 나누어, 보급선과 첩보선을 동시에 추격하였다. 그런데 이는 일본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추격하던 우리 격군은 이미 어깨의 근육이 파열될 정도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그날 부산 앞바다의 파도는 너무 거셌다. 아니나 다를까 지친 격군들이 거센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10척의 판옥선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10척의 판옥선은 하필이면 일본군의 본영이라 할 수 있는 부산 부근인 서생포(西生浦)와 두모포 쪽으로 떠내려갔다. 그리하여 결국은 일본 함대에 포위되었고 판옥선에 탑승한 1,500여 명의 조선 수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구축함이 컨테이너선을 쫓다가 표류하고 전멸당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의 우유부단함과 패전에 대한 책임 회피가 조선 수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셈이다. 만약 한산도로 회군했더라면 견내량을 틀어막아 일본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었을 것이다. 과거 한산도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는 일본군으로서는 견내량을 쉽게 뚫고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천량(거제 하청면)에서 하룻밤을 더 머무르는 탓에 그 해협 양쪽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장수들이 건의 했음에도 원균은 분노의 술만 마시면서 고집을 부리고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경상 우수사 배설은 12척의 판옥선을 몰고 조선군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7월 15일 밤, 원균은 칠천량 해협에 척후선을 세웠으나, 병사들이 너무 피로에 지친 나머지 모두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 사이 일본군은 이를 염탐하였으며, 그들은 소리 없이 우리 함대를 포위하였다.
7월16일 새벽, 포위망을 갖춘 일본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척후선(斥候船)을 쉽게 제압하고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을 이용하여 입에 칼을 물고 소리 없이 우리 갑판 위로 뛰어오른 일본군들에게 우리 수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전투태세를 갖추기는커녕 도망치느라 정신없었고 판옥선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난파되었다. 일본군들은 조선군을 무차별 베고 또 베었다. 그동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수없이 당한 복수라도 하듯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 호는 칠천량 해협을 간신히 빠져나와 진해만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속도가 빠른 일본 전함에 포위되었고 이억기와 최 호는 백병전을 치른 후 끝내 전사하였다. 그때 전사의 형태가 자결인지, 바다에 빠져 죽었는지, 혹은 적의 칼에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흑흑흑.
통제사 원균(1540~1597)은 고성 쪽으로 퇴각했고 고성의 춘원포(春元浦)까지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혼자서 도망치던 원균이 왜적에게 죽었다고 하고, 또는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27)-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