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26

한편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1593년 6월 이후 전쟁은 4년째 휴전상태에 있었다. 명일(明日) 휴전 회담은 계속되었으나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되자, 협상 당사자들인 심유경(沈惟敬, ?~1597)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결국에는 일본의 거짓 항복 문서를 만들어 명(明) 황제에게 바쳤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으로 발각되어, 결국 심유경과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목이 잘리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고니시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워낙 그를 아꼈기에 죽이지는 않았다. 명과의 휴전 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휴전 회담을 제안했으나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어 선조는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군사 지휘에 재능이 없었다. 그 많은 전투를 이순신과 함께 치르면서 눈으로 보고 귀고 들은 것조차 학습하지 못했던 무능한 무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순신이 한산도에 기거하면서 작전 회의를 했던 운주당(運籌當)은 원균에 의해 풍악을 울리는 기생집으로 변해버렸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장수들이 그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술을 즐겨 마셔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어 형벌에 대한 법도가 없었다.* 《징비록(懲毖錄,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유성용이 임진왜란에 관하여 쓴 책》 쯧쯧쯧
1597년 6월, 휴전상태에서 일본군은 거제도를 활보하며 나무를 베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일본군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며 안심시킨 후 갑자기 급습하였다. 그런데 이런 기만적 행동이 아군의 판옥선을 탈취당하는 사상 초유의 일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에 원균은 대대적으로 반격하여 판옥선을 탈취한 왜군 47명을 전멸시키고, 자랑스럽게 장계를 올려 임금을 크게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빼앗겼던 판옥선은 불타 소실되었고, 고성 현령 조응도(趙凝道, 1555~1597)를 비롯한 140여 명의 아군이 전사당한 사건이었다. 원균의 거짓 장계는 들통이 났고, 선조는 아차 싶었다. 선조가 화를 누르며 원균에게 물었다.
”적의 본진인 부산 공격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원균이 답했다. “육군 30만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먼저 공격하게 해주신다면 제가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겠습니다.” 어허, 도대체 조선에 육군 30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조는 당황스러워하며 생각한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인가.’
그러나 선조는 마지막까지 원균을 믿어보기로 하고, 권율 장군 휘하의 육군 5,000명을 떼어내어 원균의 수군에 합류시켰다. 병력을 지원받은 원균은 1597년 7월 7일 다대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에서 원균은 일본 함선 10척을 침몰시키는 공을 세웠지만 대신 판옥선 30여 척이나 잃는 대형 사고를 또 쳤다.
원균은 고개를 숙인 채 한산도로 돌아왔다. 도원수 권율은 자신의 병력 5,000명을 지원하였음에도 패해 돌아온 원균에게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술만 마셨다. 그리고 제 성질에 못 이겨 휘하 제 장들과 상의도 없이 한산도의 전 병력과 모든 함대를 출정시켰다.
1597년 7월 14일 새벽,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 1551~1599) 충청 수사 최호(崔湖, 1536~1597)가 이끄는 134척의 판옥선과 협선(挾船)들이 한산도를 출발했다. 거북선도 3척 모두 동원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래로 최대 규모였다. -26)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