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25
당시 조정 분위기는 이순신에게 극도로 불리하였다. 선조의 마음을 읽은 대신들은 이순신에 관련된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물며 류성룡조차 이순신을 구명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다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 1526~1605)이 이순신을 살려 보고자 장문의 글을 선조께 올렸다. 신구차(伸求箚, 구명을 위한 상소문)라는 정탁의 글을 소개하면,
*우의정 정 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 모(이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仁)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상소문은 ‘이순신을 살려주어야 임금인 당신이 더 돋보이게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선조를 자극한 명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을 명받았다. 엄중했던 전시 상황도 이순신의 목숨을 구한 원인이 될 것이다.
백의종군은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울 기회를 다시 주는 일종의 전시 상황 중 대기 발령 형태였다. 이순신은 옥에 갇힌 한 달여 후인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이순신이 풀려나자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위로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 1529~1601)과 비변랑(備邊郞) 이순지는 직접 이순신을 찾아와 손을 잡아주었다. 영의정 류성룡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 탁(鄭琢),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등이 사람을 보내 위로했고, 전라좌수영에서 방답 첨사를 지냈던 이순신(李純信, 무의공)이 술을 들고 찾아와 이순신(충무공)에게 권했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그날 밤, 이순신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대취했다.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풀려난 바로 다음 날(4월3일)부터 전장인 남해를 향해 떠나가는 백의종군 길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첫 번째는 녹둔도 전투) 목숨은 부지했지만 한 달여의 옥고를 치른 불편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가는 길목마다 많은 백성이 울면서 위로하였다. 이틀 만에 제2의 고향인 아산에 당도했다.
아산에서 보름 정도 쉬는 동안에 악몽을 꾸었다. 4월 11일 난중일기를 보자.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중략)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취한 것도 같고 미친 것도 같으니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 오게 했다.*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보냈던 종이 돌아와 어머니의 부음을 전했다. 불길한 꿈을 꾼 그날이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여수에 계셨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마당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더욱 북받칠 일은 어머니 변 씨(1515~1597)가 노구(老軀)를 이끌고 의금부에 하옥된 아들을 보러 여수에서 나룻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산쯤에서 기력이 쇠약해져 배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자식 입장에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불효일 텐데 자식을 만나려 배를 타고 오시면서 돌아가셨다니 이순신은 억장이 무너졌다.
이순신은 1597년 4월 3일, 의금부에서 풀려나서, 아산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상여에 올려 순천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르고 아들과 조카들과 함께 도원수 권율의 진영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두 사람의 형이 있었지만, 일찍 타계하여 상주 역할을 해야 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白衣從軍) 길을 복기하면 1597년 4월 3일 한양에서 출발하여 과천, 오산, 평택, 아산, 천안, 공주, 논산, 익산, 삼례, 임실, 남원, 구례, 순천, 구례, 하동, 옥종, 단성, 진주, 옥종, 단계, 삼가, 합천을 차례로 지나서, 초계의 도원수 권율 장군 진영에 도착하니 1597년 6월 8일이었다.
참으로 고단했던 두 달간의 여정이었다. 도원수 진영에서 권율은 이순신을 극진히 마중했다. 이후 이순신은 합천 율곡 이어해의 집에서 42일간을 머물며 권율에게 군사 일을 자문해 주었다. -25)-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