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21

웅석봉1 2024. 5. 1. 15:42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15937,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일본군은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이후 거제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한산도에서 견내량만 틀어쥐고 있으면 바다에서만큼은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전진 기지인 부산포를 다시 공격하기에도 수월했기에 한산도는 천혜의 요지였다.

 

이때, 효자로 소문난 이순신은 아산에 계시는 어머니를 여수로 모셔놓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자, 일본군들은 견내량과 거제도 안쪽으로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무관 정사준(鄭思竣, 1553~1599)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鳥銃)을 연구하여, 이에 뒤지지 않은 조선의 정철(正鐵, 순수한 쇠) 총통을 만들어 내었다.

 

조정에서조차 못 하는 일을 전장의 장수가 해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정철 총통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무관 정사준과 대장장이 이필종, 노비 안성과 동지, 언복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장계(狀啓)를 올려 이들을 찬양하였다.

 

*참조) 이순신 장계<봉진화포장 (封進火砲狀, 화포를 봉해 올리는 장계 1593813>

-중략

조총을 우리도 만들어 보려고 신의 군관 정사준이 대장장이 이필종과 노비 안성과 동지,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 총통을 만들었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다섯 자루를 봉하여 올려보냅니다. 지금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로는 이만한 것이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에서 각도와 관가에 제조 명령을 내려주시어 우리나라 조총을 앞다투어 만들도록 하심이 마땅합니다. *

 

전쟁 발발 후 16개월 만인 1593815일에 이순신은 조선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의 모든 수군을 통제하는 자리였다. 임진왜란 중에 신설된 관직(2)이기에 이순신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해군 참모총장이 된 것이다. 이는 명나라 군제에 격을 맞춘 결과로 해석된다.

 

휴전 중인 채로 1594년 새해가 밝았다. 15943, 삼도 수군의 본진인 한산도에서 출격을 시작하였다. 양국 간의 경계선이었던 견내량을 조선함대가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삼도 수군의 함대 규모는 판옥선만 124척이었고, 협선(挾船, 대형전투함의 부속선)과 포작선(匏作船, 해물을 따는 사람들이 타는 배)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수백 척이 넘었다.

 

남해안에는 20여 곳이 넘는 왜성들이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었고, 왜성들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일본의 함선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발 빠르게 전파하여 모든 일본군에 알려졌고,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망을 보던 왜선들은 포구에 숨기 바빴다.

 

한편, 조선의 작은 포작선들도 바다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왜선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군 전함의 위치와 상황들이 이순신의 기함에 속속 보고되었다. 하늘 위의 독수리가 육지의 여러 먹잇감 중에 낚아챌 대상을 고르듯, 조선 수군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먹잇감 하나가 나타났다. 우리 수군이 견내량을 넘어섰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다를 활보하던 일본 함대 30여 척이 무방비 상태로 당항포 안쪽에 모여 있었다. 이순신은 판옥선 30척을 선발하여 별동대를 만들고, 이 별동대의 지휘관으로 평소 이순신이 믿고 아끼던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 1532~1594)에게 맡겼다. -21)-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