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20

웅석봉1 2024. 4. 29. 14:05

마침내 15931월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평양성 탈환에는 사명당(四溟當, 惟政, 속명은 任應奎, 1544~1610)을 비롯한 승병들의 활약이 컸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독려하는 하교(下敎)를 보냈다. “해군들을 남김없이 이끌고 적을 모조리 무찌름으로써 적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159326, 여수 본영을 출발한 이순신이 사량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견내량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억기도 약속 날짜는 지키지 못했으나 이틀 후에 도착했다.

 

이순신 함대는 일단 가덕도 건너편 웅포로 향했다. 좁은 바다 양편에 일본군들이 전진 기지를 만들어 놓았고, 정면에는 왜성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았다. 이순신의 함대가 웅포로 들어서자, 왜성에서 조총이 쏟아졌고 대포도 발사되어 공격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하는 작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작전에 수차 당한 일본군은 더 이상 말려들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판옥선이 40, 전라우수영 판옥선이 42, 경상우수영 판옥선이 7척에 크고 작은 포작선까지 동원하면 조선함대는 300여 척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상륙할 수 없는 조선군과 넓은 바다로 나오지 않으려는 일본군의 신경전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이순신은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백병전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이순신의 활약상이 전국에 알려져서 삼혜(三惠). 의능(義能) 같은 승장들과 성응지(成應祉) 같은 의병장까지 이 상륙전에 동참하였다.

 

이순신과 이들 승병, 의병장들은 제포(齊浦, 지금의 진해) 쪽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하면서 안골포 쪽으로도 판옥선 몇 척으로 공격하는 척하였다.

 

실제로 조선의 주력군은 웅천왜성이 공격 대상이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최정예 판옥선 15척으로 구성된 특공대는 웅포를 공격하면서 수륙 양면 작전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양면 공격을 받은 적선들은 추풍낙엽으로 수장되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결국 웅천왜성은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왜성의 공격은 어려웠다. 공성전(攻城戰)을 펼칠 때는 수성군(守城軍)5배가 되어야 가능하다는데 당시 웅천왜성에는 일본군이 1만에 조선 수군도 1만 명 정도였으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 따라 웅천왜성을 공격하고 있을 시기에, 명나라 군대는 벽제관에서 패하고 개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한양에서도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이순신은 경상도 순찰사 김성일(1538~1593, 전염병으로 사망)에게 지원 요청을 했으나 육지 사정이 다급해 지원이 불가하다.’ 답을 받은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군량미와 화약도 바닥나고, 바다 위에서 여러 날을 숙영하느라 지친 병사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이순신으로서는 진퇴양난 고민되었다. 게다가 모내기 철도 다가오니, 임금께서 아군 후퇴를 이해할까를 걱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켰다.

 

일본 측에서는 웅포 해전을 자신들의 승리고 해석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웅포 해전에서 승리했다면 그들은 왜 넓은 바다로 함대를 몰고 나오지 못했는가? 웅포 해전은 분명히 이순신이 승리였다. 아쉽게도 일본의 전진 기지인 웅천왜성을 점령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웅포 해전(17, 1593. 2.10~3.6, 일본군 피해전함 51척 침몰, 2,500여 명 사망. 아군 피해불명. -20)-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