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12

웅석봉1 2024. 4. 17. 13:36

연합 함대는 610일 남해 미조항에 도착해 해단식을 하고, 전라좌수영의 함대는 여수로 무사히 귀환했다. 1차 귀향 때와 마찬가지로 여수항은 환호와 열광의 분위기였다.

 

이순신은 들뜬 마음을 다잡고자 장수들에게 당부했다. “한 번 승첩했다고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군사들을 위무(慰撫)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급보를 듣는 즉시 출전하되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라

 

이순신의 승리들(총 일곱 번의 승리)은 임진왜란 당시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꿔놓은 기적적인 쾌거였다.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조선인 대부분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사천. 당포. 당항포 그리고 율포 등 계속되는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 몸을 숨겼던 지방의 수령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방의 관료뿐 아니라 도망갔던 군인들도 돌아왔으며, 농민 등 피지배층의 의병 봉기도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더불어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가던 선조와 대신들도 자신감을 찾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 승리를 명나라에 알리며 명군 참전의 계기도 마련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두 차례 출정에서의 승리는 막혀 있는 혈관에 피를 통하게 하여 피폐한 조선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허 좋고.

 

처음 거북선을 출동시켜 시마즈(島津) ()을 깨트린 사천해전 후 임금께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의 성능을 이렇게 사랑했다.

 

신은 섬 오랑캐 왜놈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았습니다. 등판에는 쇠못을 박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왜적선이 수백 척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로 쳐들어가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와서, 먼저 거북선을 전선 가운데로 돌진시켜 천. . . 황자 등 여러 총통을 쏘았습니다

 

거북선을 건조하고 포격 실험을 마친 것이 왜적 침입 하루 전날이었다. 장부에는 30여 척의 거북선이 있다고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5척을 넘지 않았다. 거북선은 소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졸참나무. 느티나무 등 단단한 목질의 재료로 건조하였고, 충격에 강한 설계와 나무못을 쓴 것으로 돌격선 임무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순신은 아군 사상자들의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이름이 없었던 천민들에게는 입영할 당시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인다. 소속 관아에 명령을 내려 사망자의 장례비와 유족들에 대한 위로를 베풀게 하였다. 천민 출신이라도 양반 출신과 동등하게 예우하였다. -12)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