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9
이순신은 그 와중에 연화리 연명항(경남 통영시 산양읍 소재)에 몇 척의 판옥선을 매복시켜 놓았으며, 본진이 전격적으로 연안을 타고 당포항을 향해 접근하던 중 다시 판옥선 몇 척을 매복시키라는 지시를 또 내렸다. 전 함대가 무작정 당포항으로 돌격했다가 혹시나 적이 등 뒤에서 공격해 올 겨우, 앞뒤로 당할 수 있기에 매사에 위험 요소를 면밀(綿密)이 파악하고 철저히 대비한 것이다.
마침내 당포항에 모여든 적선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포항은 사천 해협과는 달리 수심이 깊고 암초가 거의 없어 육중한 판옥선이 움직이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이번에도 거북선 두 척이 속도를 내어 적선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안택선(安宅船, 아타케부네)의 누각에서 태연자약(泰然自若)하던 적장은 거북선이 안택선을 치고받자 놀란 나머지 누각에서 뱃머리로 떨어졌다. 이때 순천 부사 권준이 활을 쏘아 적장의 심장을 명중시켰다, 적장이 죽자, 일본군은 육지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뛰어들 뿐 대장선을 방어하려는 생각과 노력도 없었으니, 조선 수군이 안택선에 뛰어올라 쓰려진 적장의 목을 베기도 쉬웠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관료제 국가였다.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전사할 경우, 휘하 장졸들이 사기가 저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때는 총사령관 밑의 부장이 총사령관의 역할을 대신해서 전쟁을 이어가곤 했다.
그러나 일본은 봉건제 사회라 군대는 영주와 같은 고향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주군인 영주(다이묘)가 죽어버리면, 그 다이묘만 믿고 참전한 왜군들은 중심축을 잃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주군이 죽으면 전장에서 고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포해전의 상황이 그러했다. 적장인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목이 잘리자,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울부짖으며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당포해전, 5승. 1592.6.2, 일본 전함 21척 전파, 2,820명 사망)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은 6월 2일 당포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고성의 고둔포(古屯浦)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6월 4일, 다시 당포항 앞바다로 나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서쪽 바다 먼 곳에서 상당히 많은 숫자의 함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함대가 일본 함대인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지켜보는데 누군가가 “판옥선이다!” 외쳤다. 전라우수영의 병력이었다.
이억기는 여수를 지키고 있던 정걸 장군으로부터 이순신의 합류 요청을 전해 듣고 경상도 바다까지 달려왔다. 이억기의 기함이 이순신의 기함에 배를 갖다 대었고, 이어 이억기가 이순신의 판옥선으로 건너왔다. 그러고는 서로 얼싸안았다. 경상우수영의 원균도 함께하였다.
이순신의 판옥선 23척과 거북선 2척, 원균의 판옥선 3척, 그리고 이억기의 판옥선 25척까지 판옥선만 50여 척이 넘는 대규모 연합 함대가 구성되었다. 조선 수군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러 고도 남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1561~1597)는 임진왜란 당시 32세의 젊은 수군 제독이었다. 당항포해전부터 이순신과 함께하며 이순신을 적극 지원하였고, 그 후 이순신이 파직당했을 때 구명운동도 해주는 등 든든한 후원자 역할도 하였다,
이순신 역시 이억기를 존중하며, 군사 훈련과 실제 전투에서도 신뢰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억기는 원균의 무능함 때문에 거제의 칠천량(漆川梁) 해전(정유재란, 1597년)에서 전사하였다.
*첨언 하면, 그 해전에서 원균(삼도수군통제사)과 이억기(전라 우수사). 최 호(충청 수사) 등 세 사람의 장수가 숨을 거두었고, 1만여 명의 경험 많은 수군과 판옥선 122척이 소실되었으며, 배설(경상 우수사)은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 그래서 그 전쟁은 대패했다.
전라우수영의 이억기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모여서, 드디어 연합 함대가 구축되었다. 그런데 사령관이 세 사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억기는 이순신보다 열여섯 살이 어린 서른두 살이었고, 이순신은 마흔여덟이었고, 원균은 쉰세 살이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원균이 사령관이 되어야 하나, 겨우 판옥선 세척만 이끌고 참전하였으니, 원균이 총사령관이 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러니 총사령관은 자연 이순신이 맡았다.
6월 5일 아침, 거제도 주민들이 찾아와서 일본 수군의 행방을 알렸다. 조선의 수군을 피하려고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해 있다는 것이었다. 머뭇거릴 시간도 없이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당항포 앞으로 진격했다. -9)-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