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8

웅석봉1 2024. 4. 9. 14:30

사천해전은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2차 출정 후 첫 승리며,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전투였고, 거북선의 위력이 확인된 전투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군관 나대용(羅大用, 1556~1612, 생가, 나주시 오륜길 18~5)이 조총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순신은 거북선에 대하여 성공적인 등장에 마음이 떨렸다.’ 하였다.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은 근방의 사량도에서 며칠 휴식을 취했다. 1차 출정의 경우는 돌아올 때는 혹시 탈영하는 군사가 있을까 염려되어서, 4일 밤을 선상에서 지냈는데, 2차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올 때는 선상에서 내려 사량도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사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을 듣고 생긴 아군의 공포감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전쟁을 앞두고 겁에 질려 탈영을 시도했던 포졸 황옥현을 이순신의 명으로 목 베였던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2차 출정 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전투에서 연승한 덕분인지 조선 수군들의 사기가 1차 출정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아 있었다. 이제는 탈영에 대한 고민으로, 출렁이는 배 위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사량도 선창(船艙)에 배를 대고 군사들을 육지에서 편히 쉬도록 지시한 것이다.

 

조선 수군들을 본 사량도 주민들이 너도나도 쏟아져 나와 눈물로 반겼다. 경상우수영 관할 사량도 사람들은 여태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자신들을 지켜 주어야 할 경상우수영 수군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전라 좌수영의 수군들이 이렇게 섬을 지켜 주니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서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아끼지 않고 술을 담고 음식을 내와서, 전라좌수영 수군들을 대접했다. 그러나 이들 수군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못했다. 장수 이순신이 오늘 사천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덧나 혹시 잘못되기나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천해전에서 입은 상처는 1년 이상 이순신을 괴롭혔다. 어깨 수술을 받은 1년 후 류성룡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에서 이순신의 부상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접전(接戰)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해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 데다가,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흘러,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나랏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한편 좌우(左右) ()의 구분은 임금이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치니, 오른쪽이 전라도, 왼쪽이 경상도가 된다. 그러니 전라우도(해남)에 전라우수영이 있었고, 전라좌도(여수)에 전라좌수영이 있으며, 경상우도(거제)에 경상우수영이 있고, 경상좌도(부산)에 경상좌수영이 있었다.

 

당시 전라우수영의 수사는 이억기(1215), 전라좌수영의 수사는 이순신(55), 경상우수영의 수사는 원균(8, 16), 경상좌수영의 수사는 박홍(1816)이었다.

 

*참고-괄호 속의 관은 육지 행정구역이고, 포는 포구 행정구역을 말함.

 

전라좌수영 수사 이순신의 경우, 5관은 1) 순천도호부(현재 지명, 여수. 지휘관 부사 권준, 3), 2) 광양현(현재 지명, 광양. 지휘관 현감 어영담, 6), 3) 낙안군(현재 지명, 순천. 지휘관 군수 신호, 4), 4) 보성군(현재 지명, 보성. 지휘관 군수 김득광, 4), 5) 홍양현(현재 지명, 고흥. 지휘관 현감 배흥립, 6) 등이었고,

 

5포는 1) 방탑진(현재 지명, 여수. 지휘관 첨사 이순신 李純信, 3), 2) 사도진(현재 지명, 고흥. 지휘관 첨사 김완, 3), 3) 여도진(현재 지명, 고흥. 지휘관 만호 김인영, 4), 4) 녹도진(현재 지명, 고흥. 지휘관 만호 정운, 4), 5) 발포진(현재 지명, 고흥. 지휘관 만호 황정록, 4) 등이었다.

 

그 후, 사천에서 승리를 거둔 후 사량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우리 수군에게 당포항 쪽에서 적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전군 출정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그곳으로 직접 치고 들어가는 모험을 피해 일단 곤리도(昆里島, 통영시 산양읍 소재) 아래쪽으로 우회하여 적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돌아서 들어갔다. 8)-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