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놀이> 2~2

그러나 가끔은 유혹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녀가 부딪치니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그러나 철영 씨에게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혹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가 청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날 청자와의 춤이 어찌나 호흡이 잘 맞았든지 그는 춤을 추면서 춤꾼의 금기를 깨고 말았다. 그 나름대로 설정한 춤꾼의 금기사항은 춤 파트너를 다시 만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청자와 만나기로 한 것은 다른 흑심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다만 춤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호박>에서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렇게 춤만을 즐기던 그들도 두 달 후부터는 누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텔을 드나들었다. 그 이후 그는 가끔 청자의 핸드백에 봉투 하나씩을 넣어 주었다. 그러기를 11년이다. 그동안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몇 달씩 안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있는 정 없는 정 다 들었다.
청자의 하나뿐인 딸 생일 잔치에 철영 씨의 돈을 쓰기도 했고, 언젠가는 1박으로 정동진 여행도 다녀왔다. 그는 정이란 이런 곳에서도 드는가 싶었다. 그래서 정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리의 불빛은 오늘따라 흐릿하다. 아마 진눈깨비 때문이리라. 그는 콧물을 연신 풀면서 걸었다. 백화점을 돌아 상가 쪽으로 드는 길목에 서니 빈 깡통이 발에 걸린다. 뒤틀린 심사에 그의 발이 빈 깡통을 향한다. 그러나 발이 허공을 찌르면서 깡통을 빗나갔다.
동시에 그의 몸이 공중으로 뜨면서 곧바로 엉덩이가 길바닥을 패대기쳤다. 왼쪽 엉덩이가 뜨끔했다.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에 살짝 몸을 옮겨보지만 움직이질 못한다. 진눈깨비가 철영 씨의 잿빛 머리카락 위로 떨어진다.
지난 년 말로 그는 다니던 전자 회사에서 옷을 벗었다. 금 년 봄, 30년 동안 마누라 몰래 모은 비자금 5천을 청자 가게 보증금으로 빌려주었다. 그날 밤도 스텝을 밟은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청자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한마디 한다.
‘나, 가게 옮겼으면 좋겠어. 아주 좋은 조건의 가게가 났어. 저기 시장 입구야. 가게도 넓고 조건도 좋아. 건데……, 월세가 약한 대신 보증금이 좀 세.’ 말끝에 그녀는 한숨도 내쉬었다. 그녀의 말로는 역세권에다가 시장을 끼고 있어 시장 상인들만 상대해도 지금보다는 열 배 낫다는 설명이었다.
그 후 철영 씨는 빳빳한 신사임당 큰 것 한 다발을 건네주던 날, 청자는 ‘이제 자기 잡비는 이년이 책임질 거예요’ 환하게 웃었다. 우후후.
그러던 그녀가 잡비는커녕 돈을 건넨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서 그를 살살 피하더니 최근에는 요 핑계 저 핑계로 만나주질 않고 있다. 손님이 밤에도 온다. 시장 보러 가야 한다. 딸애하고 병원엘 가야 한다. 심지어 미장원엘 간다(자기가 미용사이면서……,)는 핑계까지 대면서 피하더니 급기야 어제는 절교의 문자를 보내왔다.
‘이제는 당신을 놓아 드리겠어요. 저도 좀 쉬고요. 사실은 당신 가정이 걱정이야.’
이년, 좋다. 헤어지자! 하지만 내가 너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어. 네가 나를 배신해! 아~ 억울해 못살아! 길바닥에 퍼 질고 누운 철영 씨는 별도 없는 밤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기가 내 지른 소리에 놀라 창피한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없이 다행이란 생각이다. 엉치뼈에 이상이 생겼는지 꼼짝도 못 하겠다. 철영 씨는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다. 흑흑흑.
한참 만에 겨우 일어난 그는 절룩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대로를 돌아 2차선 도로로 들어섰다. 시장 입구가 나오고 청자의 지하 간판 <오로라>가 저만치 보인다. 그는 엣세 한 개비를 뽑아 물고 라이터를 켰다. 두 모금 빨았다.
그러고는 가슴을 펴고 길게 숨을 마시고,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오늘이 이곳을 찾은 지 두 번째다. 진눈깨비는 여전히 세찬 바람에 더욱 흐트러져 난다. 저 건너편 아파트 사이에 걸려있던 희색 천 하나가 하늘을 향해 이리저리 날아 올라간다.
주위는 어둠이 쫙 깔리고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푸르다.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거리에는 차들의 전조등만 빠르게 움직인다. 지하로 내려간 철영 씨는 아무 소식도 없이 잠잠하다. -2~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