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4
옥포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은 도도 다카토라(1556~1630)였다. 그는 옥포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노략질하고 있을 때, 우리 포작선이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군들은 화들짝 놀랐다. 조선 침략 후 조선의 전함은 전부 도망가고 괴멸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선의 주력 선인 판옥선과 협선(15명 정도 타는 작은 유람선), 그리고 포작선(작은 고기 배)까지 100여 척의 함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어안은 벙벙하였지만, 정신은 말짱하였다. 육지에서 노략질에 바쁘던 일본군들은 부랴부랴 자신들의 전투선에 올라탔다.
그들은 전투태세는 늦었지만 자신들 만의 신무기 조총이 있었고, 조총 소리만 들어도 도망갈 조선군들이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설혹 백병전이 전개된다 해도 조선군들은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못함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함에 올라탄 일본군들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일부는 조총을 겨누고, 또 일부는 일본도를 꼬나쥐고 조선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승냥이처럼 노려봤다.
옥포만에서 징 소리가 높게 퍼졌다. 그 징 소리에 맞추어 일본군들을 향해 다가오던 조선의 전함들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는 조용히 뱃머리를 90도로 돌려 배의 옆구리를 드러냈다. 무언가 명령을 내린 듯 대장선으로 보이는 배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일본군들은 대체 조선군이 뭘 하자는 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꽝” 천지를 울리는 굉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무언가가 일본의 전함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일본도를 꼬나물고 한껏 집중하여 백병전을 준비하던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총알의 수백 배 크기의 포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으니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일본군 주변의 동료들이 포탄에 맞아 머리가 으깨지고 골절되어 쓰러졌다. 포탄을 피하면 포탄이 배의 갑판을 뚫고 밑바닥까지 구멍을 내어 바닷물이 차오르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탄성과 신음과 살려 달라는 절규, 총을 쏠 수도 없고 허공에 대고 칼질할 수도 없는 사태가 일어나니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일본군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평상시 훈련하듯 침착하였다. 격군들은 죽을 듯이 노를 저었다가 명령에 따라 배를 멈추었고, 또 명령에 따라 뱃머리를 90도 돌렸을 뿐이었다. 갑판 위에서는 역시 훈련했던 것처럼 판옥선에 장착된 함포에 포탄과 화약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기를 반복하였을 뿐이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호령했다. “특공 선단 앞으로!” 그러자 협선(挾船, 소형정)들은 빠른 속도로 궤멸 직전의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 함대에 가까이 접근한 협선들은 불화살을 날렸다. 조선군들의 불화살 융단폭격을 맞은 일본군들은 온몸에 불이 엉겨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뛰어들었고 허우적대며 죽어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일본의 전함들은 옥포만을 빠져나가기 위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도도 다카토라는 20여 척의 함선과 함께 연안을 끼고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적을 쫓기보다 눈앞에 있는 적선을 한 척이라도 더 부수고 싶었다. 그렇게 옥포 앞바다는 일본의 전함 26척이 불타거나 수장되었다.
조선 수군의 임진왜란 첫 승리였다. 서로 얼싸안은 병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외쳤고 이 함성은 어두운 구름이 깔려던 조선의 바다에 맑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는 신호탄이었다. 그날이 1592년 5월 7일(음력)이었다.
이 해전으로 일본군은 사망 4,080명에 전함 26척이 침몰하였고, 아군의 피해는 부상 1명이 전부였다. 이 해전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일본을 이긴 전쟁이며 역사는 <옥포해전>이라 명명하였다. -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