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2

마이산의 돌탑들
1580년 7월에 발포(鉢浦,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포구의 모양새가 스님의 밥그릇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 지금의 연대장급)가 되었다.
1582년(선조 15년) 1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군부대 검열관)으로 온 서익(徐益)의 묘략으로 수군만호 직(종4품, 대령급)에서 파직되었고, 5월에 한성의 훈련원 봉사(종8품, 중위급)로 재임용 근무하였다. 그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흑흑.
1583년 7월에 함경도 병마절도사(이용)의 군관(종8품)이 되어, 10월에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승진하였으며, 11월 15일, 부친 이정(李貞)이 일흔셋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584년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벼슬을 떠나 아산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른 후, 1586년 1월 한성에서 궁중의 말과 목장을 관리하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가 되고, 이어서 함경도 경흥군의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 종4품)가 되었다.
1587년 1월, 맏형 이희신(李羲臣)이 별세한다. 8월 조산보 만호직과 두만강 건너서 녹둔도(鹿屯島) 둔전관 겸임하면서, 이때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 증강을 함경북도병마절도사(이일)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는데, 실제로 그해 9월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였고, 이를 물리쳤으나 이일의 모함으로 파직,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시련이다.
1588년 2월 시전부락(時錢部落, 현 러시아 하산 지역) 정벌에 우화열장(右火熱將)으로 공을 세우고, 6월 특사로 사면되어 아산으로 낙향하였다. 1589년 2월, 전라도 감사(이 광)의 추천으로 휘하 조방장(助防將, 종4품)에 임명되고, 12월, 정읍 현감과 태인 현감(종6품)직까지 겸직한다.
1590년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 아래에 있던 종3품 무관직으로 ‘僉使’라 부르기도 한다)로 천거되었으나 진급이 지나치다는 사간원의 간언으로 유보됨.
1591년 진도 군수(종4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신안군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재임명되었고, 임지로 향하던 중 전라 좌수사(정3품)로 명받아 부임하였다. 하하하.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 제1군단 고니시 유키나가가 18,700명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였다. 다대포 성에서 윤흥신이 하루를 버텼으나 전사하였다. 부산 성에서는 정 발(1553~1592)이, 동래성에서는 송상현(1551~1592)이 분전하였으나 성은 함락당했다. 흑흑흑.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 이틀 후인 4월 15일, 경상 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통해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원균(1540~1597)의 구원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고심했다. 전라좌수영보다 전력이 더 충분하였던 경상우수영이 제대로 된 싸움 한번 못하고, 병력이 증발해 버린 것이 놀라웠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라좌수영을 지키는 일도 중요했고, 경상우수영을 돕는 일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출정 여부를 조정에 물었다. 임금의 대답이 왔다.
“원균과 손잡고 적을 물리치면 과인이 참으로 기쁘겠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고 최종 결정은 이순신 자신이 하라”
이순신은 고민에 빠졌다. 경상우수영의 보고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100여 적선이 침략했습니다’ ‘적선 350여 척이 부산포 쪽 육지에 도착했습니다’ 전황이 갈팡질팡 문제가 심각했다.
달이 5월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내부에서도 온건론과 강경론의 대립이 뜨거웠다. 마침내 이순신은 결정을 내렸다. “경상도 바다로 간다. 출정을 준비하라” 이순신은 출정에 앞서 선조께 자신의 임전 결의를 밝혔다. -2)-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