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15
“뭐라고? 병신이, 숨이 끊어졌단 말이야?”
“그런가 봐요. 어쩌죠?”
“야, 어쩌긴 뭘 어째? 저기 석유 있지. 뿌려! 질러 버려!”
야, 이놈들아! 아니다. 나는 살아있다. 아직 죽지 않았다. 이놈들아! 어버버~야! 아다 아다 아아다다~앙!……
가을 해거름이 이곳 철거의 땅 위로 느린 파도처럼 깔려 내려왔다. 그때 저만치 어버버가 손가방을 오른쪽 팔 가랑이에 끼고 어정어정 기어 온다.
주위를 보고는 맥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다. 걸어오면서 어버버는 기억을 더듬는다. 여기쯤인데, 어디가 어딘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집도 사람들도 온데간데없다. 여기 어딘가에 있어야 할 우리 집도, 아다다도 없다. 땅이 꺼지고 파헤쳐진 무덤 같은 곳에서 어디선가 매캐한 연기가 솔솔 하늘을 향하여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타야 할 무엇이 남아 있었던가. 연기를 따라가니 낯익은 물건이 어버버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의 휘청거리는 가슴속으로 천둥 같은 바람이 순식간에 번개처럼 스친다.
평생을 함께한 옷 가방과 이불 보따리가 아닌가. 왜 이것들이 여기 있는 것인가. 아다다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방은 또 어디에 있는가? 불타고 없어졌단 말인가!
아,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이놈들아! 아니 된다. 방을 돌려다오! 우리 방을, 아니면 내 돈이라도 제발 돌려다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어버 어버 어버버 하느니ㅁ도 야소하오. 어버버, 이리도 괴로 피오. 어버 버벙~뻥!” 흑흑흑.
아아 하느님도 야속하오. 정말 왜 이러시오. 내가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습니까! 어찌하여 이리도 괴롭힙니까! 정말로 야속하오. 하느님!!! 흑흑흑.
어버버는 이불 보따리를 부여잡고 한없이 소리쳤다. 그 자리에 쓰러진 어버버는 밤이 깊어 가는데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벽이 올 때까지도 그녀는 일어날 줄 몰랐다. 그렇게 어버버는 어둠 속으로 기어들었다. 저 멀리서 붉은 괴물들의 소리도 어느새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다. -end-
*참고로 이 소설의 전편 격인 『백치 아다다』는 1956년과 1988년 두 번에 걸쳐 영화화되었고 1972년 6월 22일부터 12월 1일까지 방영된 일일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고, 1983년 6월 11일에는 KBS TV 문학관 제88화로 방영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2000년대 초, 모 언론사에 투고한 글입니다. 당첨되었다는 연락은 없었으나 내 나름대로 아끼는 글입니다. 그동안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원고지 99매) 끝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