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12

6.
한참 만에 어버버가 들어온다. 손에 뭔가를 들었다. 아다다는 딸의 손에 들려있는 조그만 병을 빼앗았다. 박카스 병이다. 박카스는 아닐 테고, 이병이 무엇인고?
아다다가 묻는다. 어버버가 답한다. 참기름. 누가 주던? 동생이…… 동생? 암 그렇지. 그놈의 나이가 딸년보다 몇 살 어리다지.
아다다는 반성 없는 딸의 태도가 미웠다. 모두가 그놈 때문이다. 순간 그 병이 그놈 같았다. 아다다는 들고 있던 박카스 병을 부엌 바닥에 집어 던졌다. 병은 박살이 났다.
어버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다다가 말한다. 다시는 만나지 마라!. 너는 남자는 안 된다. 어버버는 알 수가 없다.
예전엔, 좋은데 찾아 시집가라고 했는데, 오늘 왜 이러지? 엄마가 돌았나? 내가 늦게 왔다고 기분이 나쁜 모양인가!
무조건 빌자. 엄마 미안해. 다음엔 일찍 들어올게. 그날 밤 둘은 서로 돌아누웠으나 한잠도 자지 못했다. 아다다는 속이 상해서, 어버버는 흥분을 감당키 어려워서,…….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온다. 어버버는 밤이 되어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이 세상에 그래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다.
그 더벅머리 동생은 만나면 누나 “사랑해요”를 반복한다. 입은 내 귀에다 대고 “사랑해요”하고 손은 내 가슴을 만진다. 만져도 그냥 만지는 게 아니다.
처음엔 내 젖꼭지를 통통 튕기다가 다음은 소젖 짜듯이 젖 뿌리를 지긋이 잡고 쭉 당긴다. 그러고는 전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입으로 젖을 빨아 먹을 때도 많다.
빨면서 젖이 나오는지 맛있다고 웃는다. 동생이 내 가슴을 그렇게 만지는 동안 나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금이 쑤셔 오줌을 싼 일도 있었다. 으흐흐.
이런 것은 아마 아다다는 전연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주로 마을회관에서 만난다. 그곳 열쇠를 동생이 가지고 있었다. 동생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는 또 있다.
그것은 만날 때마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화장품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참기름이다. 참기름 집 아들이니 아마 참기름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 건 이제 싫다. 다음에 만나면 그런 것 대신에 돈을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요즘 씀씀이가 늘어나서 통장에 돈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도 될까? 아이, 오늘은 동생이 찾아오질 않네. 그냥 잘까?
그렇게 황홀한 2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참 이상한 소문이 연기처럼 나돌았다. 이곳 일대가 모두 없어지고 큰 도시가 들어선단다.
서울 청계천의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는 소문이다. 호사다마라던가 누구의 운명이던가, 아니지…… 신의 시기던가? 서울이 만원이라 이곳까지 넓혀야 한다는 것이던가,
서울이 만원이고 집값이 뛰면 저 넓은 남쪽 하늘 아래로 내려가면 될 일이거늘 어찌 하필이면 잘살고 있는 이곳이란 말인가.
어버버의 가슴은 뛰고 또 뛰었다. 하느님 제발, 그게 사실이 아니지요. 어버버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었나 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며칠 전에 회사 가다 보니 저 아래 동네는 벌써 이사를 떠난 빈집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다. 12)-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