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8

그 옛날 이곳으로 처음 온 그 시절이 눈앞에 선하다. 삼 년에 걸쳐 눈비 맞으며 지은 이 판잣집을 어떻게 이별한단 말인가. 그때 새마을운동인가 하던 그때, 그날은 또 얼마나 기뻤던가, 그날도 눈물 많이 흘렸었지.
비만 오면 빗물이 방안에 뚝뚝 떨어지는 얼기설기 판자로 걸쳐진 지붕을 걷어내고 날렵한 슬레이트로 새 지붕을 입히던 그날, 모녀는 황홀하고 기뻐서 울었다.
여기 와서 서른여섯 해를 사는 동안 그런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썽은 언제나 자기였다. 순이네 장독 청소하면서 얼마나 놀랐으며,
산에서 산나물 캐다가 미끄러져 얼마나 아팠으며, 아래 동네 내려가서 길은 또 얼마나 잃었던가. 아다다는 한숨을 내쉬며 또 생각한다.
자기가 죽어 주면 딸이라도 어디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지 않을까 하고 수십 번 죽으려고 했었던 그 생각이 오늘은 더욱 간절하다. 그래 지금이라도 죽자. 죽어 버리자. 절 위 바위에 올라 뛰어내리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을 나서려는데 저만치에 반장이 올라온다. 반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여기를 올라왔다. 호구조사나 선거 때에는 더 자주 오르기도 하였다.
환갑을 훨씬 넘겼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에 목소리도 걸걸하고 활달하였다. 시장 입구에서 기름집을 하고 있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다른 사람이 반장이었다.
그때는 여기 사는 사람들은 주민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호적도 없었고 주민등록증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저 반장이, 반장이 되고 나서 주민증도 만들어 주고 선거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아다다를 본 반장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지금 이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고 하였다.
그런 반장을 보니 죽을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은 묘하다. 죽고 싶다가도 살고 싶고 사람이 묘한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묘하다.
이 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방을 여러 개 지었다고 한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무슨 돈이 많겠는가 싶어 아주 싼 돈으로 방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사비용 나오는 돈에 조금만 더 내면 된다고 한다. 월세도 없이 영원히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내일 다시 올 테니 딸이 퇴근해 오면 잘 상의해 보라고 하면서 집을 나간다. 반장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돌아서는 반장을 향해 아다다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아다다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둥근 보름달의 환상을 보았다.
아직도 아다다는 돈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저 가까운 곳에서 살집이 생길 수 있다는 데에 흡족하고 감사하였다. 8)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