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7

뒷산 망월사 골짜기엔 옥 같은 샘이 사철 흘러 물 걱정 없이 살았다. 먹을 것이 없으면 물만 마셔도 배가 불렀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절 구경 밥 구경은 하였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 날이면 모녀는 산나물을 대바구니에 담아 운주사를 찾았다. 부처님께 절할 줄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가지고 간 산나물을 법당 앞에 놓았다.
모녀는 공양줄 끄트머리에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 되면, 한 손엔 비빔밥 한 그릇 또, 한 손엔 떡 한 봉지를 받아 나무 그늘에 앉는다. 쌀로 만든 밥인데 그것이 맛있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이제 아다다의 나이도 육십을 훌쩍 넘겠다. 지난 생활은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나 나물로 연명한 시절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고맙고도 감사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살아서인지 아다다도 예전보다 많이 똑똑해졌고, 어버버는 회사에 다닐 정도로 몸과 정신이 회복되었다.
수년 전부터 어버버는 마음씨 좋은 반장의 배려로 오리 밖 읍에 있는 봉제(縫製)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그때부터 모녀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변함이 없어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세월이 흘러 오만 가지 부정과 부패로 백성들을 울린 자유당이 시민혁명으로 무너졌다.
연이어 군사혁명으로 무능하고 허약한 민주당이 무너졌고 세월이 또 흘러 혁명의 영웅도 사랑하는 부하의 권총 한 방에 이슬로 사라졌다.
그래서 군사 독재는 가고 자유의 세상이 왔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정말 꿈처럼 잠시였고 다시 피가 튀는 소동이 있고 나서 또다시 다른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단군 이래 최초로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린다고 하는 소문과 함께 다시 온 나라가 민주의 물결로 넘쳐났다.
학생과 교수가 대학을 버리고 거리로 나왔다. 신부와 목사와 승려도 동참했다. 민주의 물결이 시내 거리를 넘칠 때 산골과 들판에는 개발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일찍이 어버버가 사는 산골짝은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이다. 그런 곳을 개발업자가 가만 둘리 없었다. 가을이 되자 그곳에 산뜻한 공원묘지가 들어선다는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언제까지 집을 비우고 떠나라는 공고문이 큼직하게 담벼락에 붙었다.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사는 사람들은 갈 길이 막막하였다. 수십 년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사비용으로 조금씩 나누어 준다고는 하나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관을 업은 업자는 언제나 당당하다. 애초부터 국가 산에 집을 지었으니 불법이요 세금도 안 내고 살았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에 감사하라는 말이 전연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어버버의 가슴은 더욱 답답할 뿐이다.
며칠 전 순이네 장독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아다다도 걱정은 마찬가지다. 자기는 이제 많이 살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딸은 자기처럼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떠나라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아다다는 앞이 캄캄하다. 7)-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