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3
저녁때가 되어 하루 일을 마친 어버버가 산골 어귀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오는데 옆집 순이 엄마가 검푸른 얼굴을 하고서는 앞을 가로막는다. 겁에 질려 머뭇거리는 그녀의 옷소매를 낚아챈 순이 엄마는 큰 소리를 지른다.
“어버버! 아이고~ 못 살아. 오늘은 아다다가 우리 장독을 박살 냈어. 그 장이 얼마나 귀한 장이고, 어떻게 담은 장인데,… 어디 가서 그런 장을 또 담을꼬.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아이고~ 내 팔자야.”
한숨을 벌컥벌컥 쉬고 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어버버는 기가 질려 말문이 막혔다.
“내년까지는 걱정 없이 먹을 장인데. 지난번에는 솥단지를 박살 내더니 이번에는 장독을 깨고, 그 귀한 장까지 요절냈으니, 내가 못 산~다 못~살아. 내 오늘은 꼭 변상받지 않고는 물러서지 못하겠소!”
순이 엄마에 이끌려 순이 집 마당에 들어선 어버버는 장독대로 눈길을 돌렸다. 장독대 한가운데를 보니 아이 키 만 한 큰 장독 하나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 있고 간장 흐른 자국이 흥건하고 선명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간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버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지난겨울 눈 오는 밤에도 아다다는 순이 네의 부엌에서 단지를 박살 내더니 이번에는 장독이라 어버버도 할 말을 잃었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다다는 그때도 보름 동안 난리를 부렸고 몸살까지 했는데, 오늘도 사고를 쳤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을 참고 순이 엄마를 향해 두 손을 비벼 댄다.
“어~버 어버버 어버. 수니 어~머니, 미~아 해~오! 도 도… ㄴ, 드리게요. 내이…ㄹ”
어버버는 두 손을 맞잡고 내일 변상하겠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순이 엄마도 어버버의 변상하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반분이나 풀렸는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거린다.
어버버 보다 십 년이나 늦게 이곳으로 들어온 순이네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다. 공사판에 다니는 순이 아버지와 눈이 맞아 부모님 눈에 피눈물 뿌리고 독하게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순이네였다.
없는 사람 사정, 없는 사람이 안다고 그 사납던 순이 엄마도 이젠 온순해진다. 없는 집에 아이들은 많다던가. 연년생으로 아들 둘에 딸이 셋이니 장도 많이 담아야 했었다.
그 시절엔 다들 찢어지도록 가난했으니, 꽁보리밥에 간장도 호의호식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간장독을 깨었으니 오죽 아까우랴.
하여간 순이네도 이웃에 살면서 아다다의 기행에 벌써 여러 번 당했었다. 그때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반 보상이나 받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순이네 장독 중에서 제일 큰 놈이니, 실물이 크고 상심도 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