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동창이 밝았느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전문.
<시인 소개>
남구만(1629~1711)은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여, 함경도 관찰사. 형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다.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 어머니는 권엽(權曄)의 딸이다. 송길준(1606~1672)의 문하에서 수학,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급제해 가주서(假注書, 종칠품). 전적(典籍, 정육품) 사서(司書, 정육품) 등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 정육품)이 되었다.
1659년(효종 10)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에 속한 교리. 수찬. 등을 임명할 때의 제1차 인선 기록)에 오르고 곧 교리(校理, 종오품)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정오품)에 제수됐고, 이어 집의(執義, 종삼품). 응교(應敎, 정사품). 대사간(大司諫, 정삼품). 이조참의(吏曹參議, 정삼품). 대사성(大司成, 정삼품)을 거쳐,
1668년(현종 9)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종이품)를 역임함. 1674년(현종 15) 함경도 관찰사로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윤휴(尹鑴). 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남인 실각. 서인 정권 잡음) 도승지.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며, 1680년(숙종 6)과 1683년(숙종 9) 두 차례 대제학(大提學, 정이품)이 되었다.
이어 병조판서가 되어 폐지된 사군(四郡)의 재설치를 주장해 무창(茂昌).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1684년(숙종 10)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숙종 13)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領議政)으로 기용(起用)되고, 1696년(숙종 22)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일품)가 되었다.
1701년(숙종 27)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노론에 맞서다가 희빈 장씨의 사사가 결정되자 사직하고 낙향한다. 당시로서는 팔순을 훌쩍 넘겼으니 상당히 장수하였다.
남구만이 71세 때(1700년, 숙종 29)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면서 쓴 작품으로 전한다. 농촌의 아침 정경을 여유 있게 표현해 운치와 멋을 살린 대표적인 권농가(勸農歌)다.
지금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심곡 약천 마을 약천사 앞에 시비가 서 있다. 남구만은 이곳 약천 마을에서 약 1년간 유배 생활을 할 당시에 지은 시라는 해석도 있다.
이 시는 청구영언(1728년 김천택이 시조 580수를 역은 가곡집)에 수록된 시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초상화는 보물 제14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위키》 등 참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