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헤엄을 배우려는 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놀리는 일이다. 물 밖에서 아무리 이치를 궁리하고 설명을 들어 보았자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될수록 많은 시를 꼼꼼하게 읽는 것이 시 이해의 첩경이다.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레 문리(文理)가 트이고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우리는 즐겁지 않은 일을 오랫동안 계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 읽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벌써 시를 즐기는 것이며 어느 모로는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읽히는> 피동적인 독자에서 스스로 판단기준을 갖춘 <읽는> 독자로 올라서는 것이 곧 독자의 성숙이다. 주체적인 시 독자의 길을 구체적인 작품해설을 근간으로 해서 모색해 보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이다. 중략-
문학은 크게 보아 삶의 경험을 다룬다. 삶 체험은 문학 이해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 경험이다. 간혹 사사로운 경험을 얘기한 것은 문학 경험의 구체를 엿보기 위해서이지 볼썽사나운 자기 노출을 위해서가 아니다.
시에 대한 접근에는 여러 차원이 있지만 언어적 세목에 대한 자상한 음미가 필수적이고 기본적이다. 시의 의미가 산문적 전언이나 진술로 환원 또는 대체될 수 없다는 생각은 특정 비평 유파의 발견이나 특허 적 발명이 아니다. 옛적부터 시를 즐기고 애호한 사람들이 간파했던 국면이다. 중략-
문학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말이 통용되기 이전 저쪽에서는 시라는 말이 주로 쓰여 왔다. 서사시나 극시 등을 망라하여 시라 했기 때문에 요즘의 문학이란 말과 거의 동의어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 사이에는 시라 할 때 그것은 짤막한 서정시를 가리킨다.
하나의 변두리 형식이었던 서정시가 주요 장르로 부상한 것은 저쪽에서는 근대 낭만주의에서다. 서정시는 주관성과 내면성의 표현 영역이다. 가령 자연에의 경도나 비세속적인 것에 대한 몰입을 정신의 깊이와 섬세함을 통해서 보여준다.
초월의 정염을 통해서 사회와 사회적 소음을 극복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는 사회적 소동과 소음에 기초한 근대소설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있다. 중략-
시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직설적인 답안은 적어놓지 않았다.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과정을 시사해 놓고 있을 뿐이다. 시를 즐길 수 있게 된 독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인 독자들은 자기 몫의 정의나 결론을 타자에게 위임하거나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1995년 5월 유종호
*저자는 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이고, 소설가라는 생각이 든다.
*1995년 5월 20일 주) 민음사 간행.